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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우로우(RAWROW) — 빼기를 말하는 방식까지 빼는 브랜드

로우로우
콘텐츠 전략 브랜드 메시지 톤앤매너

이 브랜드를 고른 이유

얼마 전 가방을 하나 사면서 겪은 일이에요. 온라인 쇼핑몰 몇 군데를 돌았는데, 어디를 가든 비슷한 문장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불필요한 것을 제거하고 본질만 남겼습니다”, “미니멀한 디자인 철학을 담았습니다”. 빼기를 말하면서 문장은 오히려 더해지는 아이러니. 그러다 로우로우 페이지에 들어갔는데, 거기엔 “가방의 본질은 정리와 수납입니다”라는 한 줄만 있었어요. 빼기를 말하는 방식까지 빼는 브랜드. 그 구조가 궁금해서 들여다보기 시작했습니다.

로우로우는 누구에게 말하는가

로우로우의 웹사이트에 들어가면 “RAWROW designs TRIPWEAR for wanderers”라는 한 줄이 맞이합니다. traveler(여행자)도, commuter(통근자)도 아닌, wanderers — 방랑하는 사람. 출퇴근길도, 동네 산책도, 해외여행도 전부 하나의 여행으로 묶는 단어예요. 집을 나서는 순간 시작되는 모든 움직임에 이 브랜드는 ‘여행’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지하철에서 가방을 내려놓을 때, 로고가 보이는 쪽을 신경 쓰는 사람이 있고 아닌 사람이 있어요. 로우로우가 말을 거는 건 후자에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물건이 물건으로서 잘 작동하면 되는 사람. 로고가 마이너스 기호(−) 모양인 것도 그래서 읽히는 거예요. 브랜드 자체가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겠다는 태도의 기호.

디터 람스가 “가능한 한 적게 디자인할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건 제품이 설명 없이도 자기 기능을 보여줘야 한다는 뜻이었어요. 로우로우의 제품 페이지가 정확히 그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R BAG은 “가방의 본질은 정리와 수납”이라는 한 문장에서 출발하고, R SHOE는 “신발의 시작은 발을 보호하는 도구”라는 정의로 시작해요. 수식이 아니라 정의. 설득이 아니라 규정. 이걸 읽는 사람은, 그 정의에 동의하는 사람만 남게 됩니다.

반복되는 핵심 메시지 — THINK LESS LIVE MORE

로우로우가 가장 자주, 가장 오래 반복해 온 문장은 “THINK LESS LIVE MORE”예요. 물건을 파는 브랜드가 “덜 생각하라”고 말하는 겁니다.

보통은 반대잖아요. 이 소재가 왜 좋은지, 이 디자인이 왜 다른지, 이 가격이 왜 합리적인지를 설명하며 더 많은 생각을 요구하는 게 대부분이에요. 로우로우는 다른 방향을 택했습니다. 물건을 고르는 데 에너지를 쓰지 말라는 것. 우리가 이미 고민을 끝냈으니, 당신은 그냥 살면 됩니다.

마티 뉴마이어의 표현을 빌리면, “브랜드는 고객의 직감”이에요. 기업이 보내는 메시지가 아니라 손에 쥐었을 때 느껴지는 감각. 로우로우가 “덜 생각하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제품을 집어 들었을 때 설명 없이도 “이건 잘 만든 물건이구나”라는 감각이 전달되도록 설계했기 때문이에요. 빌 에반스의 피아노가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음 사이의 간격이 넓은데, 그 간격이 오히려 멜로디를 선명하게 만드는. 로우로우도 말하지 않는 것들 사이에서 메시지가 도착해요.

이 슬로건은 제품 이름에도 스며 있습니다. R BAG, R SHOE, R EYE, R TRUNK. 카테고리 앞에 R 하나만 붙이는 작명법. 제품명에서조차 설명을 덜어냈어요.

RAWROW 톤앤매너 — 남은 것만으로 말하기

로우로우의 문장을 모아서 읽으면 하나의 패턴이 보여요. 이 브랜드는 형용사를 거의 쓰지 않습니다.

“가방의 본질은 정리와 수납입니다. 필요 없는 장식들은 과감하게 제거하고 가방으로써 해야 할 기능에 충실하게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아름다운”, “뛰어난” 같은 수식어가 없어요. “정리와 수납”이라는 명사, “제거하고”라는 동사, “충실하게”라는 부사가 문장을 이끕니다. 형용사가 빠진 자리를 명사와 동사가 채우는 구조.

R SHOE를 설명하는 방식도 같아요. “수천 개의 구멍을 뚫어 바람이 잘 통하게 했다”, “200ml 우유 한 개보다 가볍다”. 좋다거나 뛰어나다는 판단을 브랜드가 내리지 않습니다. 구멍의 개수와 무게의 비교 대상을 제시할 뿐이에요. 판단은 읽는 사람의 몫으로 남겨둡니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이 떠오르는 방식이에요. 호퍼의 그림에서 사람들은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지만, 시선의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어디를 보고 있는지를 화가가 정해주지 않아요. 그 빈자리에 보는 사람이 들어갑니다. 움베르토 에코가 『열린 예술작품』에서 말한 것처럼, 작품이 모든 의미를 채워 넣으면 해석의 여지가 사라지고, 빈 공간이 있어야 독자가 들어올 자리가 생기는 거예요. “이 가방은 좋습니다”라고 말하면 거기서 대화가 끝나지만, “이 가방은 정리와 수납을 합니다”라고 말하면 “그래서 나한테 필요한가?”라는 질문이 독자 안에서 시작됩니다.

로우로우 콘텐츠 전략 — 맥락을 찍는 룩북

로우로우의 룩북을 넘기다 보면, 제품 사진이라기보다 어떤 하루의 단면을 보는 느낌이 들어요. 트렁크 안에 짐을 넣는 손, 백팩을 메고 택시 정류장으로 걸어가는 뒷모습, 안경을 접어 주머니에 넣는 순간. 많은 브랜드가 흰 배경 위에 제품을 올려놓고 360도로 보여주는 동안, 로우로우는 제품이 쓰이는 장면을 찍습니다. “이렇게 생겼습니다”가 아니라 “이렇게 쓰입니다”를 보여주는 방식.

이의현 대표가 밝힌 콘텐츠 원칙이 이 방향을 설명해줘요. “일방적이지 말자, 주입시키지 말자, 멋진지 예쁜지 최고인지는 소비자가 알아서 판단하게 하자.” 이건 카피의 원칙이면서 동시에 촬영의 원칙이기도 합니다. 제품을 예쁘게 찍어서 “예쁘죠?”라고 묻는 대신, 제품이 일상에 놓인 장면을 보여주고 판단을 넘기는 것.

R 시리즈라는 카테고리 체계도 같은 문법이에요. 가방은 R BAG, 신발은 R SHOE, 안경은 R EYE, 캐리어는 R TRUNK. 카테고리가 곧 이름이고, 이름이 곧 브랜드의 뼈대. 새 카테고리가 추가되어도 R + 명사라는 규칙만 따르면 되니, 확장할수록 복잡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패턴이 강화됩니다.

잘한 점 — 빼기의 문법이 모든 층위에서 반복된다

로우로우가 잘하는 건, 빼기를 한 곳에서만 하지 않는다는 점이에요. 제품에서 장식을 빼고, 제품명에서 설명을 빼고, 카피에서 형용사를 빼고, 룩북에서 연출을 빼고, 로고에서 상징을 빼서 마이너스 기호만 남겼습니다.

좋은 요리사를 구분하는 기준 중 하나가, 접시 위에 올리지 않은 재료에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넣을 수 있었지만 넣지 않은 것. 그 판단이 맛을 결정한다는 거예요. 로우로우를 보면서 떠오르는 건 그 감각입니다. 이의현 대표가 “내가 사는 대로 브랜드가 나온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 말이 허언이 아닌 게 로우로우의 모든 접점에서 같은 문법이 반복되거든요. 제품 하나를 설명하는 문장과 브랜드 전체를 설명하는 슬로건이 같은 구조로 작동한다는 건, 그 원칙이 전략 회의실이 아니라 만드는 사람의 습관에서 나왔다는 뜻이에요.

아쉬운 점 또는 확장 가능성

빼기만으로는 전달되지 않는 이야기도 있어요. 이 브랜드가 왜 이런 방식을 택했는지, 하나의 제품이 완성되기까지 어떤 시행착오를 거쳤는지 같은 과정의 서사는 현재 콘텐츠에서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2011년 서울에서 시작해 페이스북 본사 팝업, 무인양품 컨퍼런스 초청, 스테이플과의 글로벌 협업까지. 이 궤적에는 분명 풀어낼 이야기가 있을 거예요. 빼기의 결과물만큼, 빼기의 과정도 이 브랜드의 자산이 될 수 있습니다. 결과물에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콘텐츠로 한 겹 드러내는 시도가 있다면, 로우로우의 메시지는 제품을 넘어 더 먼 곳까지 닿을 수 있을 겁니다.

이 브랜드에 어울리는 콘텐츠 방향

로우로우에게 어울리는 콘텐츠는 “빼기의 기록”이에요. 하나의 가방에서 무엇을 빼고 무엇을 남겼는지, 그 판단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 R SHOE의 구멍이 수천 개라는 사실보다, 수천 개가 되기까지 몇 개에서 시작해서 왜 그 숫자에 멈췄는지가 더 강한 이야기가 됩니다.

이의현 대표가 정의한 ‘로우정신’ — “단순한 진실을 탐구한다. 나도 안 하는 짓은 시키지 않는다. 창조보다 양육이 중요하다” — 이 문장들 자체가 이미 콘텐츠의 씨앗이에요. 각각의 문장 뒤에 어떤 경험이 있었는지를 풀어내는 것만으로도, 이 글에서 다 담지 못한 로우로우의 또 다른 결이 드러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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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밀도의 글을 당신 브랜드에도 적용해보고 싶다면